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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는 왜 정치를 택했나?

현대종교 | 김현빈 기자 gus147qls@naver.comㅣ2025.10.13 10:13 입력


최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총재 한학자, 통일교)의 정치권 로비 의혹이 연이어 제기되고 있다. 통일교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외교·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정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통일교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이러한 유착의 배경에는 일부 인사의 선택이나 일시적인 현상을 넘어선 또다른 목적이 존재해 보인다.


최근 드러난 정치권 유착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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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자가 거주하는 가평 천정궁

최근 통일교가 정치권과 유착하려 했다는 정황이 반복적으로 드러나며 사회적 파장이 일고 있다. 통일교 측이 캄보디아 ODA(공적개발원조) 사업 수주를 위해 정치권에 청탁을 시도했다는 의혹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이에 따라 특검은 통일교 핵심 시설인 가평 천정궁, 마포 통일재단, 용산 천승대교회 등을 압수수색 하며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 과정에서 뇌물 의혹이 있는 물품의 영수증, 청탁 내용으로 추정되는 메모 등이 확보됐다. 이와 관련해 통일교 측은 9월 15일 “법적 절차를 피하지 않고 당당히 임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으며, 17일 한학자가 직접 특검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2022년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일본 통일교와 자민당 간의 오랜 유착 관계가 드러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반세기를 이어온 밀월


통일교와 정치권의 밀월 관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뿌리는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통일교는 국내외 정치권과 장기적으로 복합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한국에서는 과거 시절 반공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통일교는 ‘승공운동’을 내세워 정권에 협력했고, 세력을 급속히 확장했다. 이를 기반으로 교육·언론·문화 분야까지 진출하며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했다.


1970년대 초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 당시, 문선명이 “용서와 사랑, 결속”을 강조하는 전면광고를 주요 일간지에 실으며 닉슨을 공개 지지했다. 이를 계기로 통일교는 미국 정치권에 존재감을 드러냈고, 이후 닉슨 정권과 우호 관계를 형성하며 입지를 확대했다.


이후 탈세 혐의로 문선명이 수감되며 한때 입지가 위축되었지만, 최근까지도 미 정치 인사들이 통일교 관련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등 통일교와 미국 보수 정치권 간 유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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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참의원 선거 직전, 아베 전 총리와 통일교 간부 면담 사진 촬영(출처: 「아사히신문」)

일본 정치권과의 접점은 1960년대에 시작됐다. 1959년 일본에 진출한 통일교는 1968년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 전 총리의 보호 아래 국제승공연합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나섰다. 이후로도 반LGBTQ(성소수자)를 내세우고, 유력 정치인에게 비서진과 선거운동원을 파견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같은 관계는 2022년 아베 전 총리 피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사회 전반에 폭로되었다.


‘창조이상세계’ 건설을 위해


통일교 측은 근래 불거지는 정치권 로비 의혹에 대해 ‘개인의 일탈’이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례들은 통일교의 정치 개입이 일시적인 일탈이 아닌 통일교의 유구한 전통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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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이상이 실현된 지상천국 건설을 주장하는 『원리강론』(출처: 통일교 천보가정교회 홈페이지)

통일교는 창립 이래 ‘지상천국’, ‘천일국’, ‘통일왕국’ 등의 표현으로 상징되는 ‘창조이상세계 건설’을 핵심 교리로 내세워 왔다. 이러한 목표는 단지 종교적 이상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정치와 제도권 권력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구체화 되어왔다. 통일교에게 있어 정치란 교리 실현의 수단이자 전제조건인 것이다. 핵심 교리서인 『원리강론』이 주장하는바, 문선명이 왕이 되는 통일교 지상천국을 세우는 것이 통일교의 지상목표이다. 이제는 문선명의 자리를 한학자가 가로챈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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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시내에 게시된 평화자동차 광고(제공: 최재영 목사)

통일교의 정치 개입은 시대에 따라 유연하게 변모했다. 1970~80년대에는 ‘승공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강경한 반공 노선을 지지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북한에 평화자동차 공장, 평양 보통강호텔, 평화센터 등을 건립하는 등 친공노선을 통해 통일교의 입지를 확장했다. 2003년과 2008년에는 각각 천주통일가정당과 평화통일가정당을 창당하며 직접적인 제도 정치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득표수 부족으로 등록이 취소된 바 있다. 이처럼 통일교는 상황에 따라 반공도, 친공도 수용해 가며 정치권과의 유착을 ‘교리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왔다.


통일교의 정치권 유착은 단발적 사건이나 일부 인사의 일탈로 치부할 수 없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군사정권 시절부터, 대북사업과 정당 창당에 이르기까지 통일교는 권력과의 관계를 전략적으로 이용해 왔다. 국내외를 아우르며 정치권과 접촉해 영향력을 확대해 온 통일교의 행보는 명백히 ‘창조이상세계 건설’이라는 교리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략적 개입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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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현대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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